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 1

2023. 12. 19. 01:49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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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강용수

- 마음의 위기를 다스리는 철학 수업

 

 

 

Date: 2023.12.15 ~ 2023.12.17

Rate: ★ 4.8

Pages: 232.

Comment: 작은 분량의 가볍게 읽을 줄 알았던 책이, 큰 의미로 다가왔다. 

    저자는 쇼펜하우어를 주인공으로, 그의 철학관을 소개하기 위한 적극적인 설명을 읽기 쉬운 문체들로 이끌어갔다. 덕분에 쇼펜하우어의 가치관을 알아가고 이해해가는 보기 좋은 네비게이터가 되었다.

    가장 흥미롭던 내용은 염세주의의 낙관적인 그의 성격, 그의 철학관 그 자체였다. 처음 보면 조화롭지 않은 듯한 이 단어들은, 점점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한 호기심으로 커졌다. 그가 얼마나 통찰력있는 생각을 했는지 놀라웠다. 인생의 수많은 고통을 냉담히 분석하면서도 유머와 낙관적인  성격을 가졌던 것은, 그가 주장한 독자적인 삶이 만들어낸 굳건함의 실현아니었을까. 

    쇼펜하우어에 대한 호기심, 철학에 대한 큰 관심으로 본 책에 이끌렸다. 마흔은 어떤 의미인지도 궁금했는데, 인생에서의 큰 변곡점이 될 수 있는 마흔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쇼펜하우어의 인생이 마흔을 기준으로 많이 변했다고 한다. 본인에게는 마흔 쯔음의 사람들에게 전달해줄, 그들에게 필요한 이야기는 무엇인지에 대한 호기심이 들었다.

 

    고독, 인생, 행복, 자존감. 삶에 대한 의문을 가져봤다면, 고독이 키우는 강인함에 공담한다면,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들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고통

 

"모든 인생은 고통이다."

 

염세주의 철학자로 잘알려진 쇼펜하우어가 남기고 간,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말이다.

 

그가 생각하는 인생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왜 인생을 고통이라고 생각했을까.

 

쇼펜하우어가 인생을 고통이라고 한 이유는,

삶에 대한 맹목적인 의지, 그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세상의 모든 생물은 살려는 의지를 충분히 갖고 있으나
이 의지가 충분히 만족되지 않기 때문에 산다는 것은 괴로운 것이다."

 

 

저자는 이를 위한 설명으로 인생을 기차에 비교한다.

인생이라는 기차가 기관사(이성) 없이 삶에 대한 욕망(동력)에 이끌려 가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정신이 아니라, 충동에 떠밀려 간다는 말로 슈펜하우어의 철학을 설명한다.

 

그는 이성 또한 한낱 "욕망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입장이었다.

 

대조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지혜로운 인간의 능력으로,

이성을 최대한 발휘하며 자신의 인생을 사는 탁월함을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본능의 관점으로 이러한 '이성'이 이끄는 행복을 망상으로 보았다.

그는 삶에 대한 애착과 맹목적인 열망을 잘 다스릴 때, 주체적으로 행복한 삶이 가능하다고 본다.

 

"인간은 무수한 욕망의 덩어리다"

 

쇼펜하우어가 남긴 위의 말이, 그의 생각을 노골적으로 보이게 한다.

 

 

쇼펜하우어는 고통에 대한 중요성을 말했다.

개인적으로 저자의 표현들이 좋았는데,

"고통을 깨달아야 인생을 깨닫는다" 라는 소주제에서 부터 쇼펜하우어의 입장을 잘 소개한다.

 

저자가 풀어낸 고통의 중요성은,

가령, 우리는 종종 너무 쉽게 오는 것들에 대한 가치를 망각하곤 한다는 것이다.

고통은 우리가 인생을 항해함에 있어서 바닥짐이 되어준다.

 

 


# 욕망

 

쇼펜하우어가 보는 "욕망"과 "이성"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는 욕구의 의지가 우세하게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의지를 통해 욕구할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닌,

욕구하기 때문에 욕구할 대상을 찾는다는 것이다.

 

"욕망이 좋고 나쁨을 선택하는 생각에 앞서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유로운 생각을 할 수 없다"

 

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즉, 인간의 욕망이 죽을 때까지 생존을 위한 욕망을 충족해야 행복할 수 있다.

외적인 자극에서 자유로워져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한다.

 

"욕망을 자각하지 않으면 고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게 될 것이다."

 

 

 

 

# 과잉

욕망의 최대 만족은 권태이고, 욕망은 최대 결핍은 고통이다.

쇼펜하우어는 아래와 같은 말을 남겼다.

 

"고통과 무료함은 한쪽이 멀어질수록 다른 쪽이 다가온다.

 

즉, 고통과 권태라는 양자택일 앞에 인간은 불행할 수 밖에 없다.

 

 

 


결핍

 

"우리의 모든 불행은 혼자 있을 수 없는 데서 생긴다."

 

무수한 욕망 덩어리인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다. 

외적인 것에 대한 호기심, 즉 변화하는 대상에서 찾는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은 항상 새로운 것을 지향한다.

 

호기심은 자신의 결핍을 인식하고 자신의 능력을 확장하고 탐구하고 배우는 수단으로 사용하라. 

외적인 것과는 거리를 두고, 혼자있는 법을 익혀야 한다.

 

 

 

행복

 

쇼펜하우어가 생각한 행복이란 무엇일까?

 

"현자는 쾌락이 아니라 고통이 없는 상태를 추구한다."

 

 

즉, 쾌락을 찾는 것이 아닌 고통의 원인을 없애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이다.

행복은, 고통과 권태라는 불행의 길에서 이를 잘 견뎌 내는 인내력에 있다.

행복을 평가하는 기준은 성공, 부, 성취, 출세가 아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겪는 고통의 정도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노력으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쇼펜하우어가 중요하게 여겼던 것 중 하나는,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과 세계를 탐구하며 자신 스스로를 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을 알아야만 자신만의 행복의 방향이 비로소 정해진다는 것이다.

 

오랜 성찰을 통해, 타고난 욕망과 능력이 무엇인지 찾아,

그 일에서 즐거움을 찾는 일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 될 수 있다.

 

자신의 성격에 맞는 일을 찾아 선택하라.

그것이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다.

 

하던 대로 하고 살던 대로 살면 갈등과 고민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낙관적인 사람은 고난에서 기회를 보고,
비관적인 사람은 기회에서 고난을 본다.

 

 

 

 

감정

 

쇼펜하우어는 지능을 생존을 위한 도구로써 살려는 의지에 봉사하는 보조 역할을 

지성은 생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좋지만, 해결한 후엔 작동을 멈춘다.

 

오히려, 많이 알수록 불행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지식은 쓸모가 없다.

《성경 구약》 전도서 제1장 18절이 쇼펜하우어의 생각을 잘 대변한다.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죽음 자체보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고뇌의 더 큰 원인이 된다.

인간이 겪는 고통의 대부분은 상상력, 회상과 예상이라는 지성 활동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현재 행복함을 깨닫지는 못하지만,

좋지 않은 시기가 되면 과거를 그리워하며 탄식하곤 한다.

 

 

"과거의 행복에 매달리지 말고,

미래에 행복을 미루지 마라."

 

 

 

 

죽음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다.

쇼펜하우어는 죽음을 욕망을 단절한다고 분석했고,

한 사람의 죽음은 결국 아무것도 아님을 말한다.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 에피쿠로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존재할 때는 죽음이 존재하지 않으며, 죽음이 존재할 때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는 것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일까?

책에서는 이를 뒷받침하는 신화를 소개한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반인반수의 실레노스의 이야기와 지혜가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 잘 나타나 있다. 
숲속의 신 실레노스는 ‘가장 좋은 건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최선의 것은 네가 얻을 수 없다: 태어나지 않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 무(無)가 가장 좋은 것이므로.
하지만 차선의 것은 네가 얻을 수 있다 — 당장 죽는 것이므로.”

 

 

 

그렇다면 우리에게 죽음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자살이 고통을 탈피하는 방법인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을 가질 때 어떤 답을 내놓아야 할 것인가.

 

 

역설적으로, 자살은 삶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보여 준다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생각이다. 

쇼펜하우어는 욕망과 번뇌를 없애려고 했지, 삶 그 자체를 없애려고 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식탐이 많으면 살이 찌고 건강이 나빠져서 다이어트를 할 수는 있지만 금식을 권장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먹으려는 욕망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죽음은 삶에 따른 고통을 줄이려고 할 뿐, 생존 의지 자체를 제거하는 것은 아니다.
삶의 형식은 끝없는 현재다.
시간은 쉬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가는 강물과 같으며 인간은 그 물결에 휩쓸려 사라지는 존재다.
그 영원한 시간 속에서 인간이 살고 죽는 것은 ‘덧없는 꿈’과 같다.
이런 점에서 세상을 부정하는 자살은 무익하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리석은 행위다.

 

 

결론적으로, 고통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

한 인간의 죽음은 사실, 무지개를 이루는 수증기 하나가 없어졌을 때와 같은 것이다.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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