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 2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강용수
- 마음의 위기를 다스리는 철학 수업
Date: 2023.12.15 ~ 2023.12.17
Rate: ★ 4.8
Pages: 232.
Comment: 본 책은 분량이 많지 않은데, 기록하고 싶은 마음에 2편까지 적었다. 쇼펜하우어의 생각에서 새로움과 동시에 많은 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곤, 쇼펜하우어의 입장을 반대하는 인물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다. 본인을 책을 읽을 때, 공감과 동시에 불신을 갖고 읽곤 한다. 명백한 진실을 전하는지, 그 사람의 의견이라면 맞을지 아닐지를 구분하고 필자의 생각과 동일하지 않다면 그 이유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을 즐기는 탓이다. 본인의 생각을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본 책은 이와는 다르게 내용에 휘말리듯이 읽었다. 공감되지 않는 부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본 책을 읽고 니체와 관련된 책도 읽는 중인데, 아직 그렇게 큰 공감이나 감명을 얻지는 못했다. 결국, 본 책이 다른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하는 호기심이 크게 들게 만들었다.
쇼펜하우어가 제시한 내용 중 기억하고 싶은 구절이 많이 있었는데, 당장 하나를 꼽자면 "내가 깨달은 것만큼이 나의 세계다"이다. 현재 본인에게 가장 필요한 말이기 때문이다. 끝없는 경험을 원하고 세상을 알아가는 데에 큰 흥미를 느끼는 본인으로써, 지우기 어려운 생각이다. 쇼펜하우어의 주장에 따르면 지식이나 사고력은 고통이 따라온다고 하는데, 웃기게도, 세상을 많이 알수록 이 고통은 더해지는 것이다. 더 생각을 많이 할 수록, 미래와 과거를 생각할 수록 우리는 고통을 겪을 수 있다. 이를 피하기 위해 '현재'에 더욱 집중해서 머물러야 한다고 하니, 염세주의 쇼펜하우어보다 낙관적인 사람이 어디있을까 싶다.
쇼펜하우어는 염세주의 철학자로 유명하다.
그런 그를 알아갈 수록, 그 내면은 긍정적이고 유쾌하다는 사실을 알아가는 과정이 꽤 흥미로웠다.
고통과 권태라는 양자택일 앞에 놓인 인간은 불행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 세계의 본질은 끊임없이 살려고 노력하는 의지이며,
이로 인한 권태가 불행의 원인이 된다.
배가 고플 때의 고통과, 셀 수 없이 많은 음식 앞에 배가 터질 듯 부를 때로 예시를 들 수 있다.
따라서, 영원한 충족과 행복감은 없다고 한다.
욕망의 최대 만족은 권태이고 욕망의 최대 결핍은 고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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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세계를 이끌어가는 건 '의지'라고 주장했다.
바로, 삶을 살아가게 하는 맹목적인 의지이다.
개별적인 행위에는 목적이 있겠지만, 전체 의욕에는 목적이 없다.
영원한 시간 속에서 인간이 살고 죽는 것은 덧없는 꿈일 뿐인 것이다.
그는 금욕적인 삶의 의지를 부정하면서, 욕망과 번뇌를 없애는 것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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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염세주의인 사람들의 끝은 '자살'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했다. 특히,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며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들은 죽음을 가볍게 보이게 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가 주장하는 철학의 의미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보면, 오해한 내용이었다.
아니다. 그가 주장한 것이 욕망과 번뇌를 부정하는 것이지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다. 마치 다이어트를 할 때 음식을 줄여 성공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었다고, 금식을 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세상을 부정한다는 자살은 무익하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선택이기 때문에 어리석은 행위이다.
무수한 수증기로 이루어진 무지개에 물방울 한 입자가 사라진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없는 것과 같다.
자신의 고통을 주변의 고통으로 이동시키는 데에서 전체 고통의 무게는 여전하다.
쇼펜하우어 책의 저자가 말하는 쇼펜하우어는 굉장히 재치가 있는 사람이며, 인생을 유쾌하게 살았다고 한다. 언뜻 염세주의 철학자의 레이블과는 다른 삶이라고 느껴서 더 흥미가 있던 것 같다. 책의 후반부에는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행복을 추구하는 법을 다루는데, 충분한 공감이 되어 재미 요소로 다가왔다.
평정심
행복은 무엇인가를 두고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하는데,
쇼펜하우어는 "고통이 없는 상태"를 읽컬었다.
행복을 위해서는 고통이 없는 상태,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 상태, 안정과 여유를 좇아아야 한다.
그래서 외부의 것에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이 것이 그가 고독을 주장한 이유와 연결된다고 느꼈다.
현자는 쾌락이 아니라 고통이 없는 상태를 추구한다.
쇼펜하우어는 외부와 거리를 두고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강조했다.
고독
평정심, 고독과 관련된 내용을 읽고 있자니, "외부의 것에 얼마나 휘둘리는가"를 생각해보았다.
인간은 외부의 것으로 행복을 얻고, 슬픔을 느끼고, 편안함을 느끼고, 불안함을 느낀다.
외부의 것들이 생각하는 것이 곧 내 생각인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고독'은 다음과 같다.
고독은 나의 진정한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는 벗
외부의 것에 휘둘리지 말고, 본인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자.
내가 생각해서 인생을 살고, 내가 생각하는 가치를 추구하며 살자는 것이다.
익시온의 바퀴가 멈추면 에피쿠로스 학파가 말한 완전한 행복의 상태에 이른다.
그것은 감정의 동요나 혼란이 없는 평정심의 상태인 아타락시아다 -
아타락시아(ataraxia)
Ataraxia는 헬레니즘(hellenisum) 시대의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에 근거하여 쾌락의 획득과 고통의 회피가 인간을 행복하게 한다고 주장한 에피쿠로스 학파가 감정적, 정신적 동요나 혼란이 없는 평정심의 상태를 표현한 말이다.
스토아학파의 아파테이아(apatheia)와 자주 비교되는 용어이다.
에피쿠로스가 추구한 쾌락은 정신적이고 지속적인 쾌락이다.
감각적이고 순간적인 쾌락을 추구할 경우 쾌락주의의 역설에 빠질 우려가 있어 이를 추구하지 않았다.
쾌락주의의 역설이란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면 할수록 점점 더 강도가 높은 쾌락을 원하게 되어 결국에는 고통과 근심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피쿠로스학파는 어떤 쾌락을 추구하기보다 고통과 근심을 제거하여 평온한 상태를 추구하는 소극적 쾌락주의를 지향하였다.
- Wikipedia, Ataraxia
논외의 이야기이지만, 본책의 재미거리 중 하나는 간간히 출현하는 신화이야기와 쇼펜하우어와 연관된 다른 철학자들의 짧고 명료한 설명이었다. 숲속의 신 실레노스의 이야기나, 위의 인용구에서, 헤라와의 동침을 자랑하고 다닌 익시온을 제우스가 수레바퀴에 달아 영원히 돌아가게 만든 형벌을 비유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행복
행복한 인생을 결정짓는 진정한 가치는 고통을 잘 견뎌 내는 인내력에 있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행복'을 향유하는 방법은 건강, 예술 감각과 독서, 글쓰기, 거리두기 공감, 만족, 현재에 집중하는 것 등이었다.
그는 예술과 자연이 삶의 고통의 도피처, 그 이상으로 고통의 원인이자 세계의 근원인 의지를 인식하고 느끼게 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에 빠져들 줄 안다면, 의지와 고통없이 시간을 초월한 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과학이 이 세계를 인과율(법칙)로 설명한다면 예술은 이 세계의 영원한 모습을 보여 준다.
그것을 플라톤은 이데아라고 부른다.
..
자연이라는 객관에 완전히 몰입한 상태에서는 개별성이 잊혀지면서 이데아라는 세계를 보게 된다. 쇼펜하우어가 예를 들었듯이 왕이든, 죄수든, 거지든 자신의 신분을 잊고 똑같이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감상하면 삶의 고통에서 잠시 벗어나게 된다. 고통스러운 자아에서 벗어나 순수한 마음으로 대상과 하나가 될 때 고통의 세계는 사라진다.
독서
쇼펜하우어는 사유의 힘을 키울 수 있는 방법으로 독서를 권했다.
“먹은 것이 육체가 되고 읽은 것이 정신이 되어 현재의 자신이 된다.”
철학적으로 향유하려면 사고하는 근육을 키워야 한다고 전한다.
"내가 깨달은 것만큼이 나의 세계다"
또, 독서를 올바르게 하는 방식을 제시하는데, 독서 방식의 방향이 다르면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쇼펜하우어는 독서의 세 가지 방식을 제안한다.
고전을 읽고,
두 번 읽고
악서를 피하라
악서는 흔히 돈을 위해 쓰여진 책이다.
독자적인 생각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책을 읽게되면 다른 사람이 생각이 자신의 생각인 것처럼 느껴진다.
독자적인 사고란, 자신이 직접 파악하는 것을 이해한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남이 먹다 남긴 음식을 먹는 것과 남이 입다 버린 옷을 입는 사람에 불과하다.
현재
또 흥미로운 내용 중 하나는,
쇼펜하우어는 지능을 생존을 위한 도구로써 살려는 의지에 봉사하는 보조 역할이라고 한다.
너무 많은 지식, 사고력은 고통이 따라온다는 말을 전했다.
따라서 인간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이에 쇼펜하우어는 불행을 멀리하는 방법으로, 하루의 소중함을 아는 것을 강조한다.
인생 전체를 구성하는 하루하루는 똑같은 것이 아니라 어제와 다른 늘 새로운 것이다.
현재의 가치를 늘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있어야 된다.
과거와 미래에 빠져 있는 사람은 아무런 걱정 없이 살아가는 매 순간의 가치를 모르고 지나가는 일이 많다.
동물들은 미래나 과거에 대한 걱정이나 고통없이 현재를 살아 인간보다 더 행복할 수 있는 존재이며,
우리는 동물의 이러한 면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한다.
후반부의 행복을 향유하는 방법이 인생의 허망함을 느끼고 무엇이 행복인가를 찾는 사람들에겐 좋은 선택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본 포스팅에서는 그 부분까지는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궁금증이 든다면 한 번쯤 시도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